211028/ 전화일본어 3주차 - 어쩔 수 없이 역마살
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선생님과 30분 넘게 통화를 한 것 같다. 선생님께서 시간을 잘못 아신 건 아니겠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기도 했고 내 쪽에서 먼저 그만 끊자고 말하기도 이상해서 그냥 계속 통화를 하긴 했는데 ㅋㅋㅋ 약간 당황스러웠다.
오늘은 이야기 주제들은 아주 흥미로웠는데, 컨디션 문제인지 아니면 그냥 내 실력 때문인지 선생님 말을 저번 주보다 많이 알아듣지 못했다. 입도 저번 주보다 잘 안 떨어졌던 것 같다. 약간 자괴감도 들었다. 실력이 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고작 3주차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말이다.
선생님은 매번 도입 이야기나 질문을 준비해 오시는 것 같다. 저번 주엔 날씨가 이상하게 많이 춥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오늘은 저번 주보단 좀 따뜻해졌다는 이야기로 통화를 시작했다. 처음 물어보신 질문은 혈액형이었다. 아 정말 미치겠는 포인트가 이 혈액형과 관련이 있었다. 한자로 읽을 때는 그 단어 뜻도 발음도 모두 바로 아는 단어인데, 아무런 시각적 단서 없이 음성으로만 들으니 무슨 단어인지 바로바로 파악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혈액형도 그랬다. 전에 혼자 공부할 땐 한자랑 독음 외우는 게 참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독음은 물론이고 한자조차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발음만 듣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아무튼 혈액형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일본도 한국에서와 비슷하게 혈액형 유형을 성격과 관련 짓는 낭설(!)이 꽤나 퍼져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최근에는 MBTI가 더 유명하다고(사실 '유명하다' 말고 다른 표현을 쓰고 싶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말했다.
그러다 이야기는 점(占い/うらない)과 사주 쪽으로 흘러갔다. 내 생년월일시를 물으시더니 타닥타닥 타자 치는 소리가 났다. 일본 사주 사이트에 내 생년월일시를 쳐 보신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를 알려주셨는데, 메시지로 보내주신 것도 말로 해주신 것도 상당 부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대충 아는 한자들로 쓱 훑어 보니 한국에서 봤던 사주랑 얼추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신기하기도 하고...? 사주는 일본이나 한국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역마살이 빠지지 않는 건 이제 웃기지도 않다. 역마를 안고 살아갈 인생이긴 한가 보다. 선생님도 역마살이 있다고 하셨다. 이사도 많이 다니셨다고 하고, 전에 한국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하셨으니까. 나도 좀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음, 역시 공부든 취직이든 한 번쯤은 해외에 나가게 될 운명인 걸까? 그러면서 내가 스물넷 말에서 스물다섯 초반에 봤던 사주 이야기도 해 드렸다. 한 4년 정도 사회운이 안정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회사 이전도 부서 이동도(부서 자체가 없었지만) 이직도 없이 잘 다니다 보니 코로나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나 때문이었을까 하고 생각했다는 농담도 던졌다. 내가 타로카드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할걸 그랬네. 전화일본어 시간은 늘 쏟아지는 일본어를 최대한 해독하기 위해 머리가 돌아가느라 정신이 없다.
결혼 운 이야기도 했다. 사주를 보니 배우자 운이 상당히 좋다는 것 같았다. 아직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다행이라고 했다. 또 프리랜서나 사장으로서 자기 사업을 해도 괜찮은 사주라는 것 같았는데, 그러면서 꼭 여사장이 되라고, 되기 위해 힘내 달라고 하셨다. 나도 힘내겠다고 했다. 간바리마스! 좋은 표현도 알려주셨다. やる気にさせる. やる気가 뭔가를 하려고 하는 의욕 정도의 뜻인 것 같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그런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라는 맥락이었던 듯한데, 정말인지는 모르겠고 정말이라고 믿고 싶은 말이었다.
음 그리고 충격적인 이야기 두 가지. 첫 번째는 선생님이 중학생 때 검도를 배우게 된 계기였다. 지하철로 학교를 다녔는데, 성추행을 한다거나 하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선생님 아버지는 '네가 그런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한 짓을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오... 진심으로 울컥해서 말문이 잠시 막혔다. 그런 가치관이 만연했을 때의 일이니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요새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잘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선생님은 검도를 배웠고, 매일 죽도를 들고 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니까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고. 음, 여기나 저기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너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구나.
두 번째는, 일본의 결혼식에서의 '사회'는 상당한 전문성을 가진 직업으로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훈련 과정을 거쳐 선발된 사람들이 주로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는데, 그 보수도 상당하다고 했다. 2시간에 3만 엔 정도라고 했나? 일본에서 시급 2천 엔만 받아도 '꽤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그걸 감안하면 보수가 굉장히 센 편인 셈이다. 수업이 끝나고는 일본의 결혼식이 어떤지 볼 수 있는 영상이라고 유튜브 링크 몇 개를 보내 주셨다. 정신이 없어서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첫날 선생님이 다양한 일을 한 경험이 있기도 하고, 이야기할 만한 재미있는 주제를 많이 알고 계신다고 했는데 정말인 것 같다. 당장 이렇게 후기를 쓰는 게 약간 벅찰 정도로 매주 다양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심지어 수업에서 나온 얘기를 다 쓰지도 못하고 있는데 매번 이렇게 글이 길어질 정도니까. 언어 교육을 할 때에는 역시 '진공 상태의 언어'만을 다루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하는 것 같다. '실제 사용되는' 언어와, 그에 연결되는 문화 또는 사회 현상을 함께 이해시키는 작업이 꼭 필요하구나.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다양한 분야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동안 나는 별로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서 좀 반성하게 되었다. 수업에서 언급할 만한 재미있는 주제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걸 반 수준에 맞게 제시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역시 학습자가 되는 경험은 좋은 교수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인 것 같다.

